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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사진관에서 첫 롤을 직접 스캔하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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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사진관에서 첫 롤을 직접 스캔하던 날

클릭 몇 번이던 일이 시간과 정성이 되기까지

수리를 마친 카메라가 정말 살아났는지 알고 싶어서 첫 롤을 서둘러 채웠다. 다 찍은 필름을 되감아 꺼내는 일도 처음이라 유튜브 영상을 보며 한 단계씩 따라 했는데, 아날로그의 감성이란 이런 것인가 싶었다. 그렇게 꺼낸 작은 통 안에는 수리점에서 누른 첫 셔터부터 창가의 몽이까지 한 롤이 고스란히 감겨 있었다. 그 안을 들여다본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었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필름은 사진관에 맡기면 현상과 스캔을 거쳐 돌아오는 것인 줄로만 알았는데, 충무로에 손님이 직접 스캔하는 곳이 있다고 해서 그리로 정했다. 무엇보다 이 롤을 처음 들여다보는 눈이 남의 것이 아니기를 바랐던 것 같다. 점심시간에 조금 무리해서라도 서둘러 다녀오기로 했다. 고래사진관은 을지로3가역과 충무로역 사이에 있어서, 2호선이 지나는 을지로3가역에서 내려 조금 걷기로 했다.

출구를 나서자마자 을지로 특유의 공기가 밀려왔다. 한낮의 거리는 상인들과 관광객들로 북적였고, 건물은 낡았어도 거리에는 활력이 넘쳤다.

네이버 지도를 따라 걷다가 여기가 맞나 싶어 두리번거릴 즈음, 고래사진관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간판은 분명 걸려 있었지만 1층 입구에서 올려다본 계단은 좁고 어두워서, 3층에서 정말 가게가 문을 열었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한동안 긴가민가하다가 계단에 발을 올렸다.

고래가 그려진 계단을 다 오르고 나서야 마음이 놓였다. 곳곳에서 필름의 정취가 물씬 풍겼다.

문을 열기 전 입구 앞에서 잠시 서성이는데, 반대편에서 네온사인이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계단을 오르며 마주 보이는 쪽에 걸려 있었다면 아래에서부터 불빛이 보였을 테고, 1층에서 망설일 일도 없었을 텐데.

가게에 들어서자 필름에 얽힌 소품과 물건들이 먼저 반겨 주었다. 현상에 15분에서 30분쯤 걸린다고 해서, 데스크에서 셀프 스캔으로 접수하고 값을 치른 뒤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한쪽에는 필름 봉투를 꾸밀 수 있게 갖가지 스탬프가 마련되어 있었고, 그 위로 PENTAX 17이라고 적힌 빨간 종이 등이 불을 밝히고 있었다. 같은 등이 가게 곳곳에 걸려 있었다. 펜탁스가 아주 오랜만에 내놓은 필름 카메라로, 나온 지 벌써 두 해가 넘었지만 필름 카메라의 시계로 재면 여전히 가장 새로운 축에 든다. 도장은 나가기 전에 눌러 볼 생각이니, 그때 다시 천천히 구경해야겠다.

선반에는 필름이 빼곡했다. 코닥 골드도 값이 만만치 않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중 가장 저렴한 필름이었다. 비싼 필름은 손이 조금 더 익은 뒤에 언젠가 써 보기로 했다.

필름마다 그 필름으로 찍은 견본 사진이 곁들여져 있었는데, 〈은중과 상연〉에 나왔던 트라이엑스, 라이트룸 보정으로 흉내 내던 포트라 400, 엑타르 100까지 저마다 제 성격이 뚜렷했다. 결과물을 눈앞에 두고 보니 라이트룸 프리셋이나 아이폰 필터 앱으로 필름의 느낌을 그대로 옮기기는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장면을 필름 카메라와 디지털카메라로 나란히 찍어 두고 하나씩 맞춰 간다면 비슷하게 따라갈 수는 있겠지만, 대조군 없이 만든 보정은 필름을 흉내 낸 무언가일 뿐 필름은 아니다. 그런 프리셋과 앱을 숱하게 써 봤지만 끝내 마음에 드는 결과를 얻지 못했는데, 필름을 직접 써 보고 나서야 그 까닭을 알 것 같았다. 한 번도 제대로 본 적 없는 것을 흉내 내고 있었으니, 닮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맞은편 선반에는 필름 카메라들이 줄지어 있었다.

스티커도 여러 가지였지만 내 취향은 아니어서 손이 가지 않았다.

현상을 마친 필름 통을 모아 둔 상자도 있었는데, 확실히 코닥이 많았다. 내년 봄과 여름, 초록이 푸르게 짙어 갈 무렵에는 후지필름도 넣어 봐야겠다.

그사이에도 데스크는 한시도 조용하지 않았다. 매장을 찾은 손님 말고도 들어오는 접수가 많은지 직원분들은 쉴 틈 없이 분주했다.

데스크 옆 유리 너머로는 현상기로 보이는 기계들이 놓여 있었다. 필름 현상은 암실에서만 하는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는 않은가 보다. 하긴 지금의 기술로 이 정도도 풀지 못했다면 그게 더 이상했겠지. 내 필름도 지금쯤 저 안 어딘가를 지나고 있을 것이다.

기다리는 자리가 넉넉한 걸 보니 사람이 몰릴 때는 제법 붐비나 보다. 평일 오후인데도 이 정도였고, 외국인 손님도 많았다. 이런 곳을 찾는 발길은 앞으로 더 잦아지겠지. 화면 속에서 무엇이든 순식간에 만들어지는 시대일수록, 손으로 만지고 기다려야 닿는 것이 귀해질 테니까.

셀프 스캔 자리는 여덟 대에서 열 대쯤 되어 보였고, 스캐너는 모두 노리츠인 것 같았다. 어차피 노리츠를 고를 생각이었으니 따로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현상이 끝나자 직원분이 접수증에 적은 이름을 불렀다. 처음이라고 하자 자리로 안내해 주고 현상된 필름을 스캐너에 바로 넣어 주었다. 이 카메라에 첫 필름을 넣어 준 것도 수리점 사장님이었으니, 이번에도 첫 단추는 남의 손을 빌린 셈이다. 필름이 스르르 스캐너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사전 스캔이 끝나자 모니터에 미리보기가 떴다. 여기서 색을 조정할 수 있는 것 같았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한 장이라도 제대로 나오기만을 바랐는데 몽이를 찍은 한 장이 너무 잘 나와서, 더 볼 것도 없다 싶었다. 어쩌면 이 한 장을 누구보다 먼저 보고 싶어서 여기까지 왔는지도 모른다.

스캔한 파일은 PC의 정해진 폴더에 저장되고, 그걸 챙겨 가는 건 손님 몫이다. 서두르느라 외장 하드를 챙기지 못했는데, 메일로 한 번에 보내기에는 용량이 모자랄 것 같았고 카카오톡은 화질이 떨어질까 봐 내키지 않았다. 급한 대로 개인 클라우드에 올렸다. 손으로 감고 되감은 필름의 마지막 길은 결국 클라우드였다.

현상과 스캔을 마친 필름은 잘라서 보관 용지에 끼워 가거나 돌돌 말아 필름 통에 넣어 가는데, 커팅 보드와 보관 용지, 빈 필름 통까지 모두 갖춰져 있어 이것도 손님이 직접 한다. 자를 생각은 없었지만 한번 비춰 보고 싶어 라이트박스 위에 필름을 올려 보았다. 네거티브라 형체만 겨우 알아볼 수 있었는데, 방금 화면에서 본 몽이도 저 작은 칸 어딘가에 색이 뒤집힌 채 들어 있을 것이다. 필름을 잘 말아 통에 넣었다.

손님이 직접 해 보는 방식과 아날로그의 감성을 잘 엮어 기획한 곳이다. 직원분들의 작업 공간이 손님의 자리와 나뉘어 있지 않은 점은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누군가에게는 그게 오히려 좋은 점일 수도 있겠다. 이제 들어올 때 봐 둔 스탬프 앞으로 가서 도장이나 몇 개 눌러 보고 가야지.

그날 스캔한 사진들은 한 롤로 묶어 두었다.

세운스퀘어에서 수리한 미놀타 X-300과 코닥 골드 200의 첫 롤미놀타 X-300, 코닥 골드 200

나가려는데 1층에서 또 한 무리가 올라오고 있었다. 이렇게 아날로그를 지키는 곳들이 오래 이어졌으면 좋겠다.

지하철역으로 돌아가는 길에 인스타그램에서 자주 보던 타코집이 보여 한 장 찍었다. 을지로에 있었구나 싶었는데, 이 시간에도 사람이 많았다. 요즘은 사람들이 한곳으로 몰리는 경향이 부쩍 짙어진 것 같다. 시간과 돈을 들일 거라면 잘 알려지고 온라인에서 검증된 곳, 기다리더라도 실패가 적은 곳을 고르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블로그 글 하나를 보고 수리점을 고른 나도 그 마음을 모르지 않는다. 다만 이날 챙겨 나온 필름은 그 반대편에 있었다. 무엇이 찍혔는지 모른 채 한 롤을 다 감고서, 한 장이라도 건지기를 바라며 스캐너 앞에 앉았으니까.

맥북을 열고 라이트룸을 켜서 클릭 몇 번이면 그만이던 일이, 이제는 하나하나 시간과 정성을 들여야 하는 일이 되었다. 그런데도 이 불편함이 싫지 않다.